갈멜산의 물

한인환 2020-01-09 (목) 14:09 12일전 31  

갈멜산의 물

 

한인환

  아직도 예수 믿습니까?”

  장로 아들 K가 날 보자마자 억장 무너지는 말을 던진다. 그것도 교회 예배실 앞에서 제 여동생 결혼 축하객으로 축의금을 내미는 나에게, 답례품을 건네며 짐짓 놀랍다는 표정까지 짓는다.

  197312,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터라 복학까지 몇 달 여유가 있어 그를 포함하여 우리 교회 유년주일학교 졸업반 아이 십 여 명을 가르쳤다. 그들은 대개 교회 중직자 자녀들이다.

  1,2월 두 달 동안 중학교 1학년 영어와 수학 과정을 거의 마스터했다. 영어는 1과부터 12과까지 본문을 줄줄 외도록 했다. 그 선행학습 덕분인지 그들은 중고시절 공부를 잘 했고, K는 부산의대에 합격했다.

  얼마 후 우리 교회(*땅끝교회는 아닙니다) 70년 역사상 가장 힘든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대학부 지도교역자는 이모 강도사였다. 그는 80년대 초반 해방신학에 심취해 있었고, 대학부 출판물에 교회와 목사를 비판하고 욕하는 학생들의 글을 통하여 사태의 심각성이 파악되었다.

  당회는 나를 사태수습 적임자라 여겨 대학부장으로 긴급 투입시켰다. 그러나 주일학교를 통해 나와 맺은 끈끈한 정을 기대하기에는 이념 세뇌는 무서웠다. 그들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이미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청년부나 고등부 회원까지 집적됐다.

  집사님, 갈멜산에서 제단에 부은 물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리더 격인 K가 자신만만하게 도전을 해온다. 극심한 3년 가뭄으로 한 방울 물도 귀해 이 난린데, 송아지 번제물과 땔감 나무를 적시고 도랑을 가득 채운 물(열왕기상 18:35)을 어디서 구했느냐는 거다.

  하나님이시니 홍해 가르기가 가능하다. 하나님이시니 동정녀 탄생이 오히려 당연하다. 이천년 동안이나 세계만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1947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국하게 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확실하다. 이천년 전이면 우리나라는 신라 시조 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오던 때가 아닌가.

  그러나 모리아 산에서 이삭 대신 제물 양을 준비해 두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물도 준비해 두셨다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코미디 같다.

  ‘갈멜산 제단에 부은 물K에 앞서 바로 내가 지녔던 의문이었다. 책도 찾아보고 목사님께 여쭤도 봤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도 모호한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 물이 어디서 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장면에서 그게 문제의 본질은 아니지 않느냐?”

  이 강도사는 해임되고, 대학부는 잠정 해체 되었다. 이 강도사가 구포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자, K를 선두로 칠 팔 명이 그 교회를 찾아 떠나버렸다. 이 알토란같은 청년들의 이탈이 우리 교회나 가정에서 두고두고 가슴을 치는 아픔이 되었다.

  목사가 된 이 강도사는 얼마 못가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목사직 파면을 당하고, 개척교회는 문을 닫았다. 그래도 대부분의 청년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중직자 부모들조차 어쩌지를 못했다.

  그동안 K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환자를 진료하는 대신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의사들의 직업윤리 실천을 담당하는 부서의 실무책임자로 활동 중이라 했다. 그러다가 오늘 답을 얻었습니까?’ 하고 내 가슴에 비수를 찔러댄 것이다.

 

  지난 가을에 옛 교회 친구 일곱이 부부 동반으로 통영 사량도에서 1박을 했다. 신혼 때 함께 교회생활을 하다가 그간 이리저리 흩어져 살았다. 이제 모두들 은퇴하고 칠순이 넘어 다시 결성된 모임이라 살아온 이야기가 끝이 없다. 교회 이야기, 건강 이야기, 자식 특히 손주자랑은 빠질 수가 없다. 그때 우리보다 두세 살 젊었던 목사님도 그간 총회장까지 엮임 하시고 막 은퇴한 직후라, 앞으로 노년을 함께 하자며 사모님과 같이 참석하셨다.

  오후에는 한국 100대 명산 중 28위에 선정되었다는 사량도 옥녀봉에 올랐다. 예정에 없던 산행이라 250ml 생수병 하나에 손수건만 팔목에 매고 나섰다. 높이 303m에 불과하지만 옥녀봉 오르기는 가팔랐다. 절벽 틈새 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일행 대부분은 중도 탈락하고, 대여섯만 올랐다. 욕정을 품은 아비를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옥녀의 전설이 서린 옥녀봉 정상. 기암절벽 위에 섰다. 사량도에 속한 상도, 하도, 수우도가 한 눈에 펼쳐 보인다. 사량도를 품은 바다는 호수같이 맑고 잔잔하다.

  이 풍광을 사랑하여 한국 명산 28위로 선정했나 보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생수를 들이킨다. 가슴 깊숙이 맑은 공기와 함께 구석구석 묵은 때가 씻겨 내린다.

  저녁 전어 회 잔치로 모두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펜션 두 채에 한쪽은 부인들이, 다른 쪽은 영감님들이 합숙이다.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내가 건강 체질은 아닌데도 이상하게 서너 시간만 자도 거뜬하다. 옆자리에 목사님이 한잠이다. 제법 코까지 고신다.

  우리가 청년이던 젊은 시절, 해마다 여름 수련회를 가졌지. 밀양 강변에다 가정별로 텐트를 쳤다. 그때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하자며 성화셨지. 사십 년 세월에 목사님도 많이 늙으셨구나.

  모두들 잘도 자는데, 나는 갈수록 정신이 말똥거려진다. 가만히 옷을 챙겨 방을 나섰다. 펜션 뒤쪽에 사량도 상도와 하도를 연결하는 사량교가 있다. 천천히 교량을 따라 하도 쪽으로 간다. 교량 가로등 너머로 그믐달이 실눈을 뜨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새벽 공기가 참으로 정갈하다.

 

  “, 어제 옥녀봉 오를 때 무엇을 가지고 갔느냐!”

  갑자기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며 온 몸에 전율이 찌르르 흐른다.

  생수 한 병! 그렇다. 생수 한 병!

  정년퇴직 후 한 주간에 세 차례, 꾸준히 산행을 다니면서 항상 챙겨 지닌 것이 무엇인가. 약간의 간식에 생수 한 병 만큼은 언제 빠뜨린 적이 있었던가.

  수백 수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멜산에 오를 때, 맹탕 빈손이었을까. 3년 가뭄에 목말라 다 죽지 않은 것을 보면, 갈릴리 담수든 지하수든 마실 물이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산에 오르면서 호리병이나 가죽부대에 자기 마실 물은 지녔다고 봐야 한다.

  엘리야가 백성들을 향하여 물을 부으라고 지시하자, 즉각 백성들이 물을 부었다는 것은 자기가 지닌 물일 수밖에는 없다. 한 사람이 100ml 정도만 붓는다 해도 수백 리터는 될 터이니, 흘러내린 물이 도랑을 채우고도 넘치지 않았을까.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자기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 그 생명수로 제물을 씻고 제단을 씻겨 성결케 했구나. 그 직후 하늘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워 드렸고. 이 간단한 것, 너무나 자명한 일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괜한 불신으로 전전긍긍했던 지난날이 원통하다.

  내가 그때 K에게 이렇게 하나하나 설명해 줄 수 있었다면, 십 수 년 전 K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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